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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이야기

[사랑고백] 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연세대학교 대나무숲 동성애 고백에 난리 난 글과 그에 대한 답장)

by 행복을찾아@ 2021.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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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숲 #66777번째 외침:

 

 

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스무 살이어서 그렇겠지,

새내기라서 그렇겠지.

 

내가 처음 접한 대학이라는 곳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로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하니까,

 

모든 게 다 설레고 즐거우니까,

한때 지나가는 순간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밤을 지새우는 건,

 

그 밤을 지새우는 시간이 1년이 넘어가는 건,

밤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이 감정이 강렬해지는 건 당연한 거겠지.

 

언니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감정이 강렬해지지 않을 수 있겠어.

 

 

새내기 오티 때 늦으면 큰일 난다는 건

누가 알려 준 걸까.

 

탁 트인 백양로에서 건물 하나를 못 찾아

잔뜩 울상이 된 나를 언니는 어떻게 봤을지,

그런 내가 언니에겐 어떻게 보였을지,

아직도 궁금해.

 

마침 같은 과 선배였던 언니는

나를 친절하게 강의실까지 데려다 줬어.

그때 앞서 걸어가던 언니 등에서

흔들렸던 그 까만 기타 가방.

 

강의실 문을 열어주고,

다른 볼일이 있다며 돌아가려는

언니를 붙잡지 않고,

이름 한 번 물어보지 못하고 어버버 거렸던

내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몰라.

 

한껏 멋부리느라

2월의 추위는 가늠하지도 못한,

붉어진 내 뺨을 보고선

 

"춥겠다, 오티 재밌게 보내요!" 하는 게

돌아서는 언니의 인사였어.

 

이유가 뭔지도 밝혀낼 수 없던 내가

새내기로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온갖 핑계를 대 언니와 밥약을 하는 거였어.

 

언니의 카톡 하나에 설레 몇 시간 동안

옷을 입었다 벗었다 했던 나를

언니는 절대 알 수 없겠지.

 

 

<친구> 얼마나 포장하기 쉬운 관계야.

 

차라리 우리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다면,

내 머릿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생각을

싹부터 잘라낼 수 있었다면,

 

우리의 관계를 이루는 건

쌍방의 우정밖에 없고

이 우정은 절대 변치도 않고

불균형하지도 않고 비대칭이지도 않아서,

 

평범하면서 특별한 삶을 살아갈

서로의 삶에 영원한 지지자이자 친구이자

추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면,

 

내가 언니에게 그런 사람으로

평생 남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날 기억나? 여름 장마 날.

우산도 없이 학교에서 독립문까지 걸어갔던 날.

 

흐린 하늘 밑에서

우산을 푹 눌러쓴 사람들이

얼마나 바보같아 보였는지 몰라.

 

그렇게 미친 것처럼 웃고, 뛰고,

달리면서 한참을 흠뻑 젖었잖아.

 

터널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짧은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언니는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화장 지워진 거 신경쓰지 마,

지워져도 예뻐.

 

독립문에 도착했을 때

영화처럼 비가 그쳤다면

더 좋은 추억이 됐을까?

 

아냐,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을 거야.

 

회색빛이 된 독립문을

멍하니 서서 바라보다가

야, 근데 우리 여기 왜 왔냐, 하는

언니의 말에 나는 키득거렸지.

 

다시 비를 맞으며 신촌으로 돌아가

흠뻑 젖은 채 먹었던 치킨은

세상에서 가장 바삭하고 따뜻했어.

 

너무 축축해서 찝찝해,

우리보다 치킨이 더 바삭한 것 같아,

아, 튀겨지고 싶다.

 

언니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수만큼 그날 나는 쉴새없이 웃었어.

 

 

언니 자취방에서

같이 술 마셨던 날,

 

우리가 어릴 적의 곰인형과

부모님의 첫 부부싸움을 목격한 날과

첫사랑과 오티 날 입었던 옷과

 

어울리지 않았던 화장과

가장 즐겁게 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날,

같은 침대에서 잤을 때

내가 얼마나 떨렸는지 알아?

 

굳이 바닥에서 잔다고 하는데도,

침대에 올라와서 자라는 언니의 말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알아?

 

나 그날 한 숨도 못 잤어.

언니 옆에 눕자마자 술이 번쩍 깨더라.

 

혹시 실수하면 어떡하지,

언니를 안아 버리면 어떡하지,

언니에게 입을 맞추면 어떡하지.

 

결국 나는 침대에서 잠든 언니를 두고

바닥에서 내려와 누웠어.

나는 누워있는데,

내 심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친 말처럼 달려 대더라.

 

 

언니를 생각하다

스물한 살이 됐어.

 

언니는 아직도 기타를 쳐.

짧은 머리를 까닥이며 연주하는 모습에

나는 몇 번이고 반했던 거야.

 

매 공연이 끝날 때마다

언니에게 안겨줬던 꽃다발 속에,

내 새빨갛고 뜨거운 마음이

한 잎 한 잎마다 묻어 있는 게

죄스러워서 나는 축하한다는 말도

속시원히 해 본 적이 없어.

 

매일 밤 기도했어.

내가 가진 마음을 죄라고 말하는

신에게 절박하게 빌었어.

 

내일 자고 일어나면

이 마음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랐어.

 

많이 미안했고 많이 두려웠어.

이 마음을 언니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배신감이 들까.

 

세상에서 가장 친한 동생이라고

나를 소개하는 언니가

이 마음을 알게 된다면...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 언니이지만

언젠간 이 글을 보게 되겠지.

 

언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비겁하고 못되고

거짓투성이인 사람이라서 미안해.

 

그냥 나를 가만히 밀어내면 돼.

욕을 해도 괜찮고,

원망해도 상관없어.

 

지난 1년간의 죄에 대한

벌을 달게 받을게.

 

사랑해.

 

 

 

 

연대숲 #66802번째 외침:

 

 

당황하거나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야.

 

난 널 내 가장 친한 동생으로 생각했어.

내 모든 걸 너한테 보여줬잖아.

 

그런데 넌 나한테 단 한 순간도

솔직하지 않았다는 거잖아.

 

내게 보여준 그 웃음 뒤엔

나에게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는 거잖아.


매번 내게 가져다줬던 그 작은 선물들,

내 공연 끝에 안겨준 꽃다발들, 쪽지와 편지들,

이 모든 게 너에겐 대체 어떤 의미였어.

 

또 어이가 없는 건,

속았다는 걸 알게 됐는데 드는 생각은

날 속여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란 거야.

 

내가 무슨 지미 헨드릭스라도 되는 것마냥

너는 내 공연에 매번 왔었어.

대체 내 뭉툭한 연주가 뭐 얼마나 좋다고

맨 앞에서 펄쩍펄쩍 뛰며 환호했던 걸까.

 

이게 몇 달 동안 연습한 거야?

좀 더 늘어야겠다.

우리 엄마도 피식거린 공연 영상을,

내가 창피하다고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넌 몇 번이나 돌려봤었잖아.

 

네 글을 본 뒤로는 기타를 못 치겠어.
그 말이 계속 걸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라는 거.

 


그 장마철 독립문을,

자취방에서 같이 밤샌 날을,

함께 들었던 음악과 같이 울었던 시간과

같이 웃었던 장소를 내가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며칠 동안 고민해도

말은 여전히 정리가 안 돼.

 

네가 걱정돼서 댓글을

하나하나 다 읽어봤어.

너도 댓글을 다 봤을까.

 

혹시나 네가 상처받을까봐

스크롤 내리는 내내 조마조마하더라.

넌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상이야.

 

너와 나 사이의 감정을

사랑, 우정, 섹스, 죄악, 형벌 그 어떤 걸로든

정의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


난 네 곁에 있고 싶어.

네가 말했던 것처럼 영원히 네 곁에서 남아

너의 마음을 지키고 싶어.

 

더이상 네가 차가운 자취방

바닥에서 잠들지 않길 바래.

신에게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지 않길 바래.

 

너도 인정했지?

네 방식이 아주 찌질하고

비겁한 방식이란 거.

그러니까 나도 찌질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응수할게.

 

이 글을 보면 이제 내 카톡 좀 읽어 줘.

대숲 이런 거 말고 직접 내게 와 줘.

 

다시 내 엉망인 기타 연주를 봐 줘.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에

다시 독립문으로 향하자고 해 줘.

 

내가 받았던 그 꽃다발에

담긴 마음을 다시 보여 줘.

 

네가 하고 싶은 만큼 나를 사랑해줘.

내가 그 마음을 돌려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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