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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나무숲5

넌 달빛에도 충분히아름다운 사람이니까.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49958] "헤어졌어." 소주 잔을 비우며 넌 담담하게 말했다. "왜?" "그냥 서로 안 맞는 거 같아서." 실로 무난한 대답이었다. "어제도 인스타 보고 잘 만나고 있는 줄 알었는데." "해는 지기 30분 전에도 밝은 거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넌 진동벨을 눌러 소주 두 병을 더 시켰다. "누가 문과 아니랄까봐."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이별에 태연한 널 보며 놀랐지만, 이 놀라움은 금세 식을 수밖에 없었다. 소주 두 병을 모두 비운 네가 곧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고충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미묘하게 달라진 연인의 카톡 말투, 데이트 때의 적막한 분위기 따위의 흔한 이별 징조들. 너에겐 보고 싶지 않은 노을이었겠지. 친구야, 지는 해에 너무 마음 쓰지 마. 넌 달빛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언젠간 널.. 2021. 3. 13.
그런 나의 어머니를 앞에 두고, 감히 젊은날 고생은 해봐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린 꼭 아파야 청춘인 걸까.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나는 서자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2015년 11월 22일 나는 서자다. 조선시대도 아닌 현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는 나는 서자다. 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의 나의 어머니를 사랑했다. 나의 어머니도 그를 많이사랑했겠지. 그에게 이미 가족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땐, 나의어머니의 뱃속에는 내가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나를 지우는 대신 평생을 홀로 외롭게 사는 길을 택하셨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혼인 신고를 하지 못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지 못 했다. 대신 큰아버지의 호적에 올라 지금의 성씨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호적을 빌려주었다는 명분으로 여전히 나의 어머니는 큰집에 인사를 한다. 명절이면 양 손 가득 과일을 사들고 큰집에 인사를 간다. 돌아오는 건 없다. 돌아오는 건 어머.. 2021. 2. 8.
이제는 너를,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빵 굽는 냄새를 사랑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너는 어떤 향기를 제일 좋아해?]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2016년 2월 12일 “너는 어떤 향기를 제일 좋아해?” “향기? 갑자기 향기는 왜?” “우리 곧 1주년이잖아. 향수 사주려고. 내가 조금 알아봤는데... 플로럴향, 시트러스향을 많이 쓴대." "아쿠아향은 바다를 떠올려주는 상큼한 향이 나고, 그린향은 4월의 풀 향을 맡을 수 있대. 그리고..” “있잖아.” 마치 명동 로드샵의 판매원이 된 것처럼 이런저런 향의 종류를 늘어놓는 내 말을, 너는 끊었다. “응.” “나는 향수 안 좋아해.” “왜?” “향수의 진한 향이 싫어서. 독해.” “음.. 그래도 남들은 다 향수 선물 같은 거 하던데? 그래도 좋아하는 냄새 하나쯤은 있지 않아?” “있어.” “뭔데?” “빵 굽는 냄새.” 멋이 없었다. 그때는 한창 로맨틱한 걸 좋아하던 나이였으므로.. 2021. 2. 7.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한 권리.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없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운동화만 신는 친구]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2016년 1월 5일 · 운동화만 신는 친구 최근 한 교수님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요새 무얼 하고 사느냐고 질문하셨다. 막 기말고사가 끝나 지쳐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 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틈틈이 알바나 과외 같은 걸로 용돈을 번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대답을 들은 교수님은 혀를 끌끌 차셨다. 요새 아이들은 참 낭만이 없다고 했다. 시험기간이 되어 공부하는 건 이해한다고 해도, 바쁘지 않을 때에도 스마트폰만 뒤적이고 카페에서 노닥거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방학에 여행이라도 떠나라고 하셨다. 훗날 떠올리면 여행했던 날들만 기억에 남지, 이렇게 공부나 하고 알바하며, 커피마시고 카톡 하며 빌빌대는 삶은 다 부질없다고 하셨다. 나도 교수님의 말씀에 .. 2021. 2. 7.
[사랑, 이별] 보름 뒤에 전 여자친구의 여동생과 결혼을 한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충분히 그녀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한데 여태 이를 부정했던 것이다.] 보름 뒤에 전 여자친구의 여동생과 결혼을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슬픈 한 편의 영화이다.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날, 전 여자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 왁자지껄한 행사 분위기와 달리 붙임성이 부족했던 나는 홀로 야구중계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 작년에 한국시리즈 7차전 봤어? 난 가족끼리 잠실가서 나지완이 끝내기 홈런 치는 거 봤어! ”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녀였다.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고, 우리의 첫 만남은 이렇듯 무척 싱겁게 끝나버렸다. 다음날, 나는 다짜고짜 초코라떼 한 잔을 사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하루가 지났다고 평생 없던 숫기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컵에 ‘어제 너무 미..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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