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2016년 1월 5일
운동화만 신는 친구
최근 한 교수님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요새 무얼 하고 사느냐고 질문하셨다.
막 기말고사가 끝나 지쳐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 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틈틈이 알바나 과외 같은 걸로
용돈을 번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대답을 들은 교수님은
혀를 끌끌 차셨다.
요새 아이들은 참 낭만이 없다고 했다.
시험기간이 되어
공부하는 건 이해한다고 해도,
바쁘지 않을 때에도 스마트폰만 뒤적이고
카페에서 노닥거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방학에 여행이라도 떠나라고 하셨다.
훗날 떠올리면 여행했던 날들만 기억에 남지,
이렇게 공부나 하고 알바하며,
커피마시고 카톡 하며 빌빌대는 삶은
다 부질없다고 하셨다.
나도 교수님의 말씀에 부분적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알바를 끝내고,
커피 한 잔씩 마시며 쉬다가,
다시 힘을 내어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는 내 삶이,
절대 의미 없는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난 용돈을 스스로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알바를 해야만 했다.
알바를 통해 사회경험을 하겠다는
대의명분 같은 거, 사실 있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안정적으로 용돈을 주실 수 있다면,
암기 쪽지를 만들어 알바 틈틈이 보는 짓,
사실 나도 대학생인데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저녁 7시에 알바가 끝나면 내겐 5시간이 남는데,
3개의 전공과목이 낀 18학점을 공부하려면
남은 시간을 오롯이 공부에 투자해야만 한다.
5시간도 모자라 늘 공부시간은
다음날 새벽 1시, 2시로 넘어간다.
이렇게 새벽까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쫓기 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은 필수가 되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스마트폰을 붙잡고 친구들과 카톡이라도 한다.
버티는 삶은 외로운 삶이며,
그 한없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치는 것이다.
내 동기 한 명은 늘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친구들이 워커화나 구두, 부츠를
이것저것 바꿔 신으며 대학의 자유를
신발의 자유로 만끽할 때에도,
그 녀석은 3월 개강부터 12월 종강까지
운동화만 신은 것이다.
심지어 한날은,
가까운 지인의 장례식장까지도
운동화를 신고 왔다.
그 날, 그놈은
우리 무리 아이들의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자유 국가에서 운동화 사랑하는 것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쳐도,
장례식에는 구두를 신고 간다는 예의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놈은 매우 심하게
낯을 붉히며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도 오늘만큼은 구두를 신으려고 노력,
또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알고 보니, 그 친구의 발에는
선천적 결함이 있었다.
구두와 같은 딱딱한 신발을 신으면,
신발이 땅의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
충격이 발로 오롯이 전해지고,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우리만 괜찮으면
장례식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운동화를 벗어놓고,
맨발로 따라 들어가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가 멋쩍게 제안하며
내비치는 부끄러움은,
오히려 그를 욕했던
우리의 몫이어야 했다.
내 하루의 삶이
비록 알바, 공부, 커피, 카톡으로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20대임에도
훌훌 여행 하나 떠나지 못하는
척박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의미 없거나 부질없는 삶은
아니라고 믿는다.
수능을 포기하고 세계일주를 하는
모험가 친구의 이색적인 삶만큼이나,
나도 가능한 선택지들 가운데서
신중하게 선택과 포기를 하고,
고통을 느끼며, 인내를 하고 있다.
우리는 그놈이 도대체 왜
구두 한 번 안 신는 것인지 질책하기 전에,
왜 운동화밖에 신을 수 없는 것인지를
이해하여야 했다.
내가 타인의 삶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그 자신도 스스로의 삶에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일일 경우가 많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한 권리.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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