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 · #42829번째포효
전역 축하해.
제대와 전역 둘 중 뭐가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에게
좋은 날이란건 변함 없으니
내게 익숙한 단어를 썼어.
연락이 끊긴지 한참이라
어떻게 알아볼까 고민하던 찰나
다행히도 네 인스타에
글이 하나 올라와있더라.
SNS에 글을 올리는게 영 어색하다며
아무 글도 올리지 않던 너라
팔로우만 해놓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기념비적인 날이라
너도 글을 올렸나봐.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채로
활짝 웃는 너,
어머니와 꽃다발을 들고
어색하게 웃는 너,
군복사진,
휘황찬란한 모자까지.
그 사진들 중 내가 없는게
어쩌면 넌 더 익숙할 수 있겠지.
이제는 무슨무슨 병장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사람들,
축하한다는 너의 친구들,
그리고 나는 쓰지 못했던 댓글마저도.
참 이상하지,
아직까지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게.
사람들은 헤어지게 된 것에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
이별을 포장하곤 하지만,
좋아하게 된 것에는
굳이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잖아.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일거야.
미용실 갈 돈이 없어
늘 눈썹과 눈동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던 네 앞머리,
유독 닳아있던 컨버스화,
곧 찢어질 듯 아슬아슬했던
검은색 가방도 좋았어.
또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반짝 빛나던 눈동자,
바르고 예쁜 말들만 해주던 목소리,
가늘고 기다랗던 손가락도 좋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널 좋아했을거야.
그냥, 정말 그냥.
미팅이나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이
주지 못했던 벅차오름,
널 보면
울컥한게 치밀어오르는걸 느끼고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지.
상대적으로 여유있었던 나와,
어려웠던 너와의 관계.
내 여유로움도 내 덕이 아니고,
네 어려움은 네 탓이 아닌데
왜 우리는 그것 때문에 헤어져야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너는 아려나 모르겠지만,
너와 데이트를 하고나서
집에 가는동안 참 많이 울었다.
식당에서 가격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표정에
이번달 생활비와
동생에게 줄 용돈 사이에서
고민하는게 훤히 드러나서,
내 생일선물을 위해
택배를 날랐다며
멋쩍게 웃던게 아파서.
어느날은 과외를 준비하느라
잠도 못 자서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안절부절 못하던게 슬퍼서.
너와 여행을 간 날
많이 보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던 너와 또 같이 울던 나,
생활비를 아껴
립스틱을 사왔다던 너에게
차라리 그 돈으로
제대로 된 밥이나 먹었어야지 라며
울었던 나, 달래주던 너,
그 립스틱이
닳아없어질때까지 쓰던 나를 생각하면
참 널 많이 사랑했구나 싶다.
그 립스틱은 사실 나와는 맞지 않는
컬러였는데도 늘 먼저 손이 가더라.
또 참 많이 웃기도 했다.
단골 데이트 코스가 되어버린
한강변을 거닐면
친구들이 자랑했던 드라이브나, 호텔이나,
애인이랑 간 해외여행 따위는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한강이 보이는 식당에는
데려가주지 못하지만,
한강을 갈 땐
언제나 손을 잡아주고
집에 데려다주겠다던 너 덕분에
정말 많이 웃었다.
계속 줘도 남는건 마음밖에 없다며
사귀는 내내 빠지지 않고 써줬던
손편지들은 세기도 힘들 정도다.
알바하다가 틈이 나서 썼고,
과외학생이 문제를 푸는동안
한 단어라도 썼다던 너의 글씨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웃을 때는 살짝 패이는 보조개도,
내가 선물해준 옷은
날 만날 때만 입는다던 바보같은 말들도.
아무 때나 입어도 되고,
얼마든지 더 줄 수 있었는데
넌 한 번도 내게
뭘 사달라 한 적이 없었지.
그래도 너는
처음 사귈 때 말했던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다 가시지는 않았나 보더라.
커피 한 잔 제대로
못 사주는 자기의 처지가,
집에 돌아오면
내가 몰래 채워놨던 지갑을 보는게,
같이 여행을 가자며
여행지를 보여주는 내게
화를 냈던게 비참하다 소리치고
울었던걸 보면 말이다.
억울하다 싶었어.
너보다 멀리 보지 못하는 내가,
당장 네가 웃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해서 뭐든지
사다주고 싶었던 내가,
생일날 받았던
비싼 옷가지와 선물들 사이에서
가장 빛났던 네 편지를 보고
행복해하던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억울했어.
널 사랑했던게 잘못일까,
내가 부자인 집에서 태어난게 잘못일까,
내가 어설프게 배려했던걸까..
아직도 모르겠어 사실.
도망치듯 군대로 떠난 네가
마지막으로 준 편지는
너무 많이 읽어서 이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죄다 암송할 수 있을 정도인데,
소포라도 보내면
또 널 아프게 할까봐
내가 할 수 있었던건
무사히 그곳에서
나오길 기도하는 것 뿐이더라.
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동안
많은걸 했어.
너와 꼭 가고 싶었던 유럽도 다녀왔고,
면허를 딴 기념으로 차를 몰고
해안도로를 덜덜 떨며 달리고,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보았어.
그러면 널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지.
괘씸한 놈,
나같이 좋은 사람이 어딨다고
되뇌이며 말이야.
내 집안을, 외모를,
옷맵시를 칭찬하는 남자들과
밥을 먹은 적도 있어.
결국은 소용이 없었지만,
당장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인지라 버틸만 하더라.
휴가 때 혹시 네 친구들이
사진을 올리지는 않았을까 싶어
들락날락 하기도 했고,
그러다 발견한 사진 속 네가
더 마른 것 같아 혼자 울기도 하고.
주변 친구들이 바보같고
미련하고 멍청하다 했지만
민들레 씨앗을 불며
소원을 빌자던 너의 순수함이,
가을날 은행을 피하며
깔깔대던 천진난만함이,
그리고 나에게 키스해줄 때면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잊혀지지가 않아.
이제는 내가
연락을 해야할 것 같아.
네 착한 성격에 혹시라도
내게 짐이 될까봐
연락을 못할 수도 있으니.
아냐,
그 짐 따위 같이 들면 그만이고
사랑을 얹어주면 그만이야.
너와 내가 눈을 맞추고 있는데
그깟 돈은 아무 문제가 아냐.
날 이용해줘,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줘.
언젠가 그랬지.
민망한 말이지만
별처럼 빛나는걸 사주긴 힘들어도
널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난 빛날 준비가 되어있으니
이제 내게 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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