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대나무숲 - #36219번째 포효
나 얼마 전에
증명사진을 찍으러 갔었어.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서.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앉았어.
그리고 사진사분의 말대로,
머리도 한 번 더 정리하고.
고개는 좀 더 왼쪽으로,
어깨는 내리고.
그리고 카메라를 응시했지.
이제 자연스럽게 웃으라고 하셨어.
그런데 표정을 못 짓겠는 거야.
순간적으로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어.
사실 요 며칠동안 웃을 일이 없었거든.
큰 시험을 준비한다는 거
생각보다 힘든 일이더라.
하루종일 힘들게 공부하고 돌아오면
유일하게 날 반기는 것은
불 꺼진 좁은 방뿐이야.
아무리 외로워도
주위 사람들과의 연락은 부담스럽고,
부모님께 투정부릴 나이도 지났잖아.
세어보니까 나 하루에
다섯마디도 안 하더라.
이러다 말 하는 법도
잊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부담감은 커지고,
잠은 안 오고,
너도 내 곁에 없고.
네가 그랬지,
나 이 성격 그대로 가다간 분명
시험 준비 시작하고서도
매일 밤 울고 있을거라고.
이럴 때 보면 우리가
꽤 오래 사귀었긴 했나봐,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걸 보면.
맞아, 나 매일 울어.
요즘엔 잠도 못 자서
약도 먹고. 바보같지.
하여튼. 결국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고 어떤 사진이 좋을까
고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어.
사진사 아저씨께서는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리고 사진 보정하는 걸 구경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어.
지금 공부하고 있냐고 물어보시더라.
힘들진 않냐고.
너무 힘들면 친구들 만나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쉬는 시간도 가지라고.
남자친구한테
기대보기도 하라고.
그래서 네 얘기가 나왔어.
시험 준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서 헤어졌다고 말했거든.
그랬더니 너한테 연락 다시
안 왔냐고 대뜸 물으시더라.
안 왔다고 했지.
난 너한테서 연락이 혹시 올까봐
차단도 안 해놨는데.
너는 독한건지,
나에게 완전히 무관심해졌는지,
다른 여자가 생겼는지
나에게 연락 한 번 오지 않았어.
연애할 때 자존심도 다 버려가면서
구질구질하게 널 붙잡던 내가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너는 내가 헤어지자는 말에
그냥 내 손을 놓아버렸어.
사진사 아저씨랑 얘기를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저런 식의 마음에
쌓아뒀던 말들을 하게 되더라고.
가까운 사람한테는 오히려
더 하지 못했던 솔직한 마음들을
털어놓고 있었어.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사진을 받으러 저녁에 다시 사진관에 갔더니
아저씨가 마음에 드냐고 하시면서
증명사진을 보여주시더라.
마음에 든다고,
잘 찍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아저씨가 나한테 초콜렛을 주시는거야.
단 것 먹고 기운 좀 내라고.
그리고 이 초콜렛 먹으면
그 친구에게 연락 올거라고.
너한테 연락 왔으면
좋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내가 했던 말들이 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나봐.
그런데 그 말 들으니까,
괜히 못 먹겠는거 있지.
나 초콜렛 엄청 좋아하는데
먹을 수가 없더라.
먹고 나서 너에게 연락이 안 오면
괜히 실망할 것 같아서.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사실.
너와 함께했던
2년의 시간이 그립기도 하고,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내가 먼저 손을 놓아버릴 정도로 힘들었던
마지막 한 두달 때문에
네가 너무 밉고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해.
너와 행복하게 잘 지내는 걸
상상하면서 미소지으면서도,
재회는 이별의 연장선이라는 말처럼
같은 이유로 헤어지는 걸 상상하게 돼.
그런데 내일 공부하다가 지치면
이 초콜렛 먹으려고.
네가 올 지 안 올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 이 자리에서,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고 있을게.
네가 이 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덕분에 오늘은 울지 않고 잠드네.
너도 푹 자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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