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나무숲 이야기

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잘 하고 있다고, 나도 견디고 있으니 당신도 좀 만 견뎌달라고.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23797]

by 행복을찾아@ 2021. 2. 6.
728x90

2016年12月1日#23797번째포효

 

 

자랑은 아니지만,

난 어렸을때 부터 꽤 힘든 삶을

자라왔다고 자부한다.

 

태어난 시기에 아빠 회사가 부도가 났고,

아빠는 나보다 두살 많은

언니의 분유값을 들고 놀음에 빠졌다.

( 아, 이건 뒤늦게 안 사실이다. )

 

엄마는 지방에서 아빠대신

언니와 나를 키웠다.

 

자연스레 내게서

아빠란 존재는 잊혀져 갔고,

엄마한테 얼핏들은 바로는 아빠는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난 엄마, 언니와 함께 지방생활을 하다

아빠를 몇년 만에 처음 만났다.

 

철없던 어린애였던 나는

그저 아빠를 만난다고 좋아했다.

 

엄마와 아빠는 외식 사업을 시작했다.

작지 않은 규모의 냉면집이었고,

나름 장사가 잘된다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지만...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되었는데,

우리집에 검은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언니가 뒤늦게 알려준 사실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초등학교 1학년 때 올라왔다.

난 서울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저 새 친구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들떴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그냥 별 또래와 다를 것 없는

초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내 인생중 첫번째

최악의 시기를 맞이했다.

 

왕따.

 

내 삶에서 없을 줄 알았던 왕따였다.

그것도 내가 당하는 입장이었다.

 

같이 잘 놀던 친구들이

하나, 둘 나를 외면하고,

따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난

무리중 혼자 남아있었다.

 

머리가 컸다. 라는 표현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어른들 앞에선 사이좋은척,

아이들끼리 있을 땐 난 늘

애들의 눈엣가시였고

뒷담화의 중심이었다.

 

정말 악을 쓰고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학교가는게 정말 싫었고,

그들의 시선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학교에 가고,

집에갈땐 누구보다 늦게 집에 갔다.

 

혹여, 내 물건이 없어질까

사물함에 꼭꼭 걸어 잠구고 두고간 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 하고 집에 갔다.

 

 

그 어느때와 같이

난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치자 엎드렸고

내 옆을 지나가는 무리 중 한명이

내게 종이를 던지고 갔다.

 

엎드려서 펼쳐보니,

자신들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끔

왼손으로 삐뚤빼뚤 적어낸 글자였다.


그 쪽지에 내용은 이러했다.

 

'언제죽냐' , '죽어' , '왜살아' 라는 등의

내게 자살을 권유하는 단어들이었고,

그 쪽지를 받은 후에 난

그저 머릿속에 엄마 생각만 났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모를 분이셨고,

난 집에오면 여전히 푼수같은

철없는 막내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집에 가고싶었다.

더욱 엄마 품이 그리워 지는 날이었고,

집에 오면서 누가 보던 상관 없이

15분 거리를 엉엉 울면서

30분이 넘게 걸리도록 온 것 같다.

 

집에 오니 그리운 집냄새와

엄마가 해놓고 간 닭볶음탕,

끼니를 거르지 말라는 엄마의 손글씨가 있었다.


그 쪽지를 잡고 또

몇시간을 울어 제꼈을까,

언니가 집에 도착했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나를 달랬다.

 

언니는 내가 왕따란걸

알아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엄마한테

'ㅇㅇ이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라고

말 한 것 같다.

 

절대 어딜가서 기죽지 않던 내가

왕따를 당한다니,

엄마한텐 큰 충격이었을 것 같다.

 

엄마한테 구구절절 있었던 일 들을 말해주니,

엄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엄만 늘 강하고,

멋진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내 앞에선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던 분이셨다.

 

다음날 엄마와 함께 등교했다.

조회를 할 때 쪽지를 쓴 아이들이

누구냐고 나오라고 큰 소리쳤다.

 

난 천군만마를 얻은 것 마냥

기분이 우쭐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학부모 상담과

담임 선생님 면담이 몇차례 이뤄졌다.

 

자연스레 나는 그 아이들과 멀어졌고,

그 이후로 나를 괴롭히거나

왕따를 시키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렇게 고요하게 중1을 마치고,

중2때 영원히 함께 할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고등학교도 함께 올라오고,

동아리도 같이 배우며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동아리는 댄스 동아리 였는데,

그 속에서 현대무용을 함께 배웠다.

 

어느 때와 같이 무용 콩쿨 연습을 하며

땀을 흘리고 있을 때,

그 친구와 무슨 패기 였을까.

 

오늘이 아니면 안될 갓 같다는 생각으로

라면을 먹겠다고 연습을 제꼈다.
물론 ,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라면을 먹고 마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친구 핸드폰으로 친구 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우리엄마가

직장에서 쓰러지셨다고 한다.
당시 핸드폰이 없던 터라,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겐 늘 멋있고, 강할 것 만 같던

우리 엄마가 쓰러졌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집에 뛰어가서 집전화로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입원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병원을 오라고 했다.

 

교복을 벗지도 못하고,

눈물로 얼굴을 범벅한 채 떨리는 손으로

허겁지겁 짐을 챙겨 지하철을 탔다.

 

병원에 가니, 엄마는 누워있었고

아빠와 언니가 나를 달래주었다.

그렇게 몇번을 엄마 병실에 왔다갔다 했을까.

 

엄마의 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아빠는 언니에게 먼저 병명을 알린 것 같다.

 

언니는 첫째 딸이지만,

고작 나랑 두 살 차이 나는 여고생이었다.

 

아빠가 진지하게 나를 불렀다.

 

'ㅇㅇ아 , 엄마가 간암3기래 '

 

아, 하느님도 야박하시지.

엄마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먼저 데려가시는 걸까.

 

모든게 다 내 탓이다.

엄마한테 대들고 버릇없이 굴었던

내가 파노라마 처럼 스쳐지나갔다.

 

언니는 수능과 수시를 준비하느라

병실에 오래 있지 못했고,

아빠는 회사의 휴직과 보험처리 그리고

엄마의 병수발을 드느라

점점 야위어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나와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엄마의 치료나 허드렛일을 처리했다.

 

하루가 다르게 엄마한테 투여되는

약물의 강도는 세지고,

엄마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6인실을 쓰다가 5인실,

2인실 까지 왔다.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루는 아빠가 운동화를 사주겠다며

언니와 나를 병원으로 불렀다.

 

엄마가 말했다.

 

'우리 딸 더 예뻐졌네? 우리 돼지 예뻐.

 저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라고 말했다.

 

저 옆에 있는 사람은 언닌데...

엄마가 힘들게 가진 첫째 딸인데...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아빠가 언니를 데리고 자리를 비웠다.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온기가 별로 없었다.

 

'ㅇㅇ아, 엄마 없어도 아빠말 언니말 잘듣고,

 어디가서 엄마 없는거 티내지 말고,

 너는 나를 닮아서 어딜가서든 잘할거야.

 엄마는 ㅇㅇ이 믿어 ' 라고 말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엄마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괜히 왜 그렇게 말하냐고 투정부렸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병실은 따뜻했다.

엄마의 손은

병실의 온기만큼 따뜻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났을까.
언니와 난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집전화로 전화가 왔다.

아빠였다.

 

전화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 고비라는 식으로 말했으리라 짐작한다.
택시를 탔다. 엄마가 누워있었다.

 

1인 병동이었다.

이제와 안 사실이지만 아마 임종실 같았다.

 

엄마 옆엔 자질구레한 기기들이 많았고,

1인용 침대가 있었다. 새벽안개가 자욱했다.

 

아빠가 침대에 앉아 고개를 떨궜다.

언니가 그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아빠와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나도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이든지 5분도 채 안되서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났다.

 

내 생에 두번째 최악의 순간이었다.


간호사가 분주하게 병실 문을 열었고,

주치의와 여럿 의사가 함께 들어왔다.

 

안된다.

엄마를 이렇게 떠나보낼 순 없었다.

 

열일곱 내 생의 전부였던,

나의 든든한 버팀목인 엄마가

내 곁을 떠났다.

 

엄마 손을 잡으니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늘 만지던 아주

조금이라도 따스함이 있던 손이 아니라,

정말 차가운.

 

그 해 유독 빨리온 겨울처럼 차가웠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냥 꿈이라고.

엄마가 심정지가 온거라고 다시 숨쉬고

눈만 감고 있는거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엄마가 누워있던 침대를 뺐다.

영원히 함께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갔어... ㅇㅇ아,

 리엄마가 하늘나라로 갔어 ' 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정말 정신 없이 엄마의 장례를 치루고,

가족 중 나만, 열병에 걸려 학교를 거의 못갔다.

 

살이 급격히 빠졌다.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다시 병원에 있는 엄마라도 보고싶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우리집의 온기처럼

쌀쌀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또 두번째 영원할 것 같은 친구를 만났다.


고2는 정말 순탄하게,

내가 지금까지 지낸 학창시절 중 가장

즐겁고 또 기억에 남을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쌓고,

친구란 이런것 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가장 열정적이 었고,

가뭄이 와 쩍쩍 갈라진 땅을 가진 내게

단비를 뿌려준 친구들을 만나,

'엄마가 준 선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남들과 똑같은 고3을 보내고,

입시에 찌들어 살았다.

 


정신 없는 3월을 보내고 나는

일을 병행하며 학교를 다녔다.

 

처음으로 이성에 눈을 뜬 스무살이었다.
다른 오빠들과는 다르게

유독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ㅇㅇ오빠 라고 부르지 않고 ㅇㅇ씨 라고 불렀다.
말 놓는게 뭐 그리 어렵다고,

3개월 동안 항상 존댓말을 써가며 ㅇㅇ씨라고 불렀다.

 

무더운 여름이 서서히 지나갈 때 쯤

그 오빠에게 진득하게 연락을 했다.

 

이런저런 농담도 하고

서로 휴무가 맞지 않는 날엔

자신이 무얼 하는지 알려주기도 하며

흔히 말하는 썸을 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상하고 재밌는 사람이었고,

4살이나 많은 만큼 어른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5개월 알고 지냈을까,

단체 회식이 있던날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주량을 뛰어넘어 마셨다.

 

정말 취한다는게 이런거구나,

내 술버릇을 처음 알았다.

 

내가 너무 취한 탓에 1차를

여기서 마무리 짓는 분위기 였다.

 

나도 대충 내 짐을 챙겨 나오는데,

오빠가 나를 데려다 준다고 했다.

 

정말 떨리고 또 온갖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을 가는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내가 오빠한테 고백을 했다.

 

"오빠, 좋아해요."

 

오빠는 당황한 기색과

놀람이 뒤엉킨 얼굴 이었다.

 

아, 내가 성급한 결단을 내린 걸까. 라고 생각한 순간
오빠가 내 손을 잡았다.

 

서로 손을 잡고

여름에서 완연한 가을로 넘어간 듯 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집 앞 까지 데려다줬다.

 

그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빠와 다른 커플들 처럼

투닥거리며 싸우기도 하고,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메꿔가며 연애를 하고 있다.


오빠 생일 선물을 준비하다가 들통나서,

내가 씅을 내며 오빠에게

영수증과 선물을 공개했다.

 

오빠는 생일을

처음 축하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챙겨주고 싶었고,

좋은 날 함께 하고 싶었다.

 

오빠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날 내가 겪었던 일들과

엄마 얘기를 오빠에게 해주었다.

오빠는 더욱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키와 덩치는 나보다 큰데,

내 품에 안겨서 눈물만 연신 흘려대고 있었다.
오빠를 토닥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신이 단어를 만들 때

 부인을 잃은 사람을 홀아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사람을 과부라 하는데,

 자식을 잃은 슬픔은 헤아릴 수 없어서

 단어를 못만들었다는 말이 있어."

 

"엄마는 나를 잃었으면 얼마나 슬프겠어.

 나는 비록 엄마를 일찍 보내줬지만.

 내 곁엔 아빠도 있고 언니도,

 오빠도 있잖아. 걱정마.

 나 오빠가 생각하는 만큼 약하지 않아." 라고 말했다.


오빠는 울먹거리며

"왜이렇게 예쁘게 컸어." 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렇게 나는 내 전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났고,

또 여전히 만나고 있다.

 

연신 나를 예뻐해주는 사람이고,

내가 좀 더 경제적 여유와 마음가짐이 된다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나는

행복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내 스무살을 밝혀준 사람들과

또 내 가족, 남자친구에게 모두

감사하단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내가 사랑한 자리마다 모두

폐허가 될 줄 알았던 나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힘들어도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나도 견디고있으니

당신도 좀 만 견뎌달라고.

 

2016년 20살의 끝자락에서..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