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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이야기

[사랑, 우정] 나는 더 이상 너랑 친구 못할 것 같아.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24046]

by 행복을찾아@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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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12月11日#24046번째포효

 

너는 내 오랜 친구였다.

 

또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이야기가 술자리의 주제로 오르면

내가 당당하게 제시하던 반례이기도

했다. 였다. 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난다.

 

한 여름,

우리는 교복을 입고 일렬로

강당을 가득 채워 앉아 있었다.

 

나는 네 뒤에 앉은 친구에게

꽝꽝 언 쭈쭈바를 던져 주려다

네 머리를 맞췄다.

 

너는 네 또래의 남자애들이 으레 그랬듯

인상을 찌푸리고 욕설을 뱉는 대신,

크게 웃었다.

 

'이거 나 먹어도 되냐' 하면서.

 

그 날부터 너는

이름 모르던 수 많은 남자 아이들 중 하나에서

내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부끄럽게도 그 때 난 정말 입이 험했다.

너는 그 버릇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없이 말을 툭툭 내뱉으면

너는 '여자애가 말 버릇이 그게 뭐냐' 라는

편견섞인 말 대신,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덕분에 그 버릇을 많이 고친 것 같아

고맙기도 하다.

 

물론 내가 싫어하는 네 성격도 있었다.

너는 남의 일에 오지랖을 잘 부려

자기 일처럼 걱정하곤 했다.

 

나는 매번 내 일에 신경끄라거나,

남의 일에 그렇게 신경쓰다

사기 당하기 딱 좋다거나 하는

말을 네게 했었다.

 

너는 항상 화가 나면 절대 말을 안하고

속으로 삭혔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이라는 건 항상 내가 떠들고

너는 듣고 있는 쪽이었다.

 

네가 여태껏 만난 여자친구들은

작고 순해보이는 인상을 가졌었다.

 

반면 나는 항상 어딘가

삐뚤어져보이는 남자애들을 좋아했었다.

네 말대로라면 양아치같은 새끼들.

 

나는 그 때 네 입에서 나왔던

가장 상스러운 말에 조금 놀랐었다.

 

너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우는 나에게

골라도 꼭 그런놈들만 만난다며

또 다시 오지랖을 부렸다.

 

그 날 나보다 더 취한 너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웃기도 했다.

 

우리는 술취해서

토하는 등을 두드려준적도 있고,

추하게 엉엉 우는 것을 달래준 일도 있고,

 

꼬장을 부리는 동영상,

온갖 엽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서로의 흑역사도 당연히 알고,

심지어는 부모님들끼리도

서로 아는 사이다.

 

좋아하는 이상형도

서로와는 정말 정말 정말 다르다.

 

때문에 나는 항상 너를

성별만 남자인

내 친구로 생각할 수 있었다.

 

너는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두 달 전의 일이다.

우리는 종종 만나는 동네 친구들 모임에서

평소처럼 죽기 직전까지 술을 마시고는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갔었다.

 

술을 잘 마신다고 자신하는 나도

그 날은 꽤나 취했었는지

그 때가 몇 시인지 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흡연자인 친구들 몇은

담배를 피러 나가고,

또 친구 둘은 이미 맛이 가서

노래방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고,

너는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나는 네 노래를 한 귀로 들으며

어렴풋하게 떠오르지 않는

노래제목을 검색하고 있었다.

 

네가 부르던 노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너를 쳐다보았다.

 

그 노래는

오랜 친구 사이었던 남자가

여자에게 숨겨온 마음을

고백하는 가사였는데...

 

맹세코 이전까지

그 노래에 네 얼굴을 대입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하필이면 노래의 클라이맥스.

 

나는,

정말 병신같이 그 노래가

나한테 하는 말처럼 들리더라.

 

내 생각엔 꽤나 오랫동안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서 내 볼을

몇 번이나 내리쳤는지 모른다.

 

술이 웬수라더니,

쟤가 남자로 보이네.

내가 진짜 취하긴 취했나보다.

 

 

심장이 막 뛰는

그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라서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래도 진정이 도저히 안되길래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나왔다.

 

네가 단톡방에서 묻더라,

나 어디 갔냐고.

 

나는 대답했었다.

너무 취한 것 같아

택시타고 먼저 왔다고.

 

난 고작 그 카톡에도 두근거리는

미친 것 같은 내 모습에

침대에 누워 마구 이불을 찼다.

 

그런데 아직도

그 술이 깨지를 않는다.

나는 하루종일 네 생각을 했다.

 

내가 항상 그지같다고 놀렸던

네 단정한 옷차림.

 

네 얼굴과 목소리,

너와 했던 이야기들.

 

그러다 얼마 전 부터는 네 손 끝,

신발끈의 묶인 모양 따위를 떠올린다.

 

그건 아마 요즈음

너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네 사소한 스킨십과

말 한마디에 수십번 의미부여를 하고

또 한숨을 쉰다.

 

네가 그 날 불렀던 그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서 삭제하기도,

하루 종일 반복 재생해 듣기도 한다.

 

네게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네게 빠지는 건 정말 순간이었는데

빠져나오기가 너무 힘들다.

 

너는 우리 학교도 아니고,

또 SNS를 즐겨 하지도 않으니

아마 네가 이 글을 보게 될 확률은

0에 수렴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손을 떨며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소중히 쓴 편지를 유리병에 넣어

망망대해로 띄워보내는

내 소심한 용기가 네게 닿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한다.

 

나는 내일도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너를 대할 것이다.

모레도, 그 다음날도.

 

그래도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네가 이 글을 본다면

내게 답해줬으면 한다.

 

여자친구 소개시켜준다는 말에

왜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냐고.

 

왜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우리 집 문 손잡이에

귤을 걸어놓고 갔냐고.

 

나는 온통 스마일이 그려진 그 귤을

거의 물러질 때까지 바라만보다

겨우 먹었는데, 넌 그걸 아냐고.

 

영화는 왜 보자고 한건지,

네 상태메세지는 누굴 말하는 건지,

또 왜 밤마다 잘자라고 카톡하는지.

 

그 날 정말

넌 아무 뜻도 없었는지.

 

네게 난 여전히 성별이 여자인

좋은 친구일뿐인지.

 

머릿 속이 온통

물음표 투성이다.

아니라면 전부 내 착각이라면

차라리 단호하게 말해줘.

 

나는 더 이상 너랑

친구 못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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