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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이야기

[사랑, 이별] 보름 뒤에 전 여자친구의 여동생과 결혼을 한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충분히 그녀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한데 여태 이를 부정했던 것이다.]

by 행복을찾아@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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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뒤에 전 여자친구의

여동생과 결혼을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슬픈 한 편의 영화이다.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날,

전 여자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

 

왁자지껄한 행사 분위기와 달리

붙임성이 부족했던 나는

홀로 야구중계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 작년에 한국시리즈 7차전 봤어?

 난 가족끼리 잠실가서

 나지완이 끝내기 홈런 치는 거 봤어! ”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녀였다.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고,

우리의 첫 만남은 이렇듯

무척 싱겁게 끝나버렸다.

다음날,

나는 다짜고짜 초코라떼 한 잔을 사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하루가 지났다고

평생 없던 숫기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컵에

‘어제 너무 미안했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라고 적힌

포스트잇을 붙여 건네주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녀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무렵,

 

뜻밖에도 그녀로부터

고맙다는 문자가 왔고

우리는 문자를 주고받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둘이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정문에서 기숙사까지

수없이 걷기도 했고,

 

서울 명소를 모두 섭렵하겠다는 목표로

주말엔 늘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두 달여가 흘렀을까.

 

봄기운이 절정에 달할 무렵,

자연스럽게 우리는 연인 사이가 되었고

그녀 덕분에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스무 살이 더욱 찬란하게 빛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덜컥 이듬해 1월

카투사 모집에 합격해버린 것이다.

 

입영날짜가 확정된 뒤로는

서로 웃고 있어도

늘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결국 크리스마스이브 날 참았던

설움이 한순간에 터져버렸고

둘 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현실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새해 일출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입대 전 마지막 그녀와의 여행이었으므로

설렘보다는 슬픔이 더 컸지만

이를 애써 억누르며

그녀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돼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태껏 약속시간을 어겨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설령 약속시간보다 늦을 것 같으면

반드시 연락을 먼저 남겨놓는 그녀였다.

 

그저 사정이 있겠거니

묵묵히 기다렸지만 30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불길한 예감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게

그녀가 교통사고로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나는 당장 중앙대병원 응급실로 달려갔고

병원에서 꼬박 이틀을 지새우며

그녀가 깨어나길 간절히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는 깨어나지 못했다.

 


빈소가 마련되기 전,

그녀의 어머니가 상자 하나를 건네주셨다.

 

피로 얼룩지고 구겨진 상자 안에는

우리의 사진과

편 책자형식으로 묶여있었고,

 

표지에는

‘너가 어디 있든 우리 사랑은 멈추질 않아’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보자

그녀가 나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이 한순간에 휘몰아쳤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입대하고 나서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극심한 우울증에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할 수조차 없었다.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데에만

꼬박 2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겨우 복학을 결정하고

봄 학기가 다시금 시작될 무렵,

날 걱정하던 친구들이 내 손을 이끌고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 끌고 갔다.

 

반가운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새내기 때와 마찬가지로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홀로 침울하여 구석에서

혼자 소주만 들이켰다.

 

시간이 흘러 분위기가 무르익자

신입생들이 자리를 섞기 시작했고

이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릴 때는 가족이랑 같이

  야구장에 갔었는데요.

  이제는 기아가 너무 못해서

  야구 잘 안 봐요! ”

야구 중계가 나오는 핸드폰을

잠시 덮어두고 목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은 순간

덜컥 눈물이 났다.

 

죽은 그녀가

내 앞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자리를 떴다.

 

취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라 생각한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방금 전 상황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녀가 이번에는

내 이름까지 부르며

상자 하나를 건네줬기 때문이다.

 

상자 안에는 내가 입대하고 나서도

줄곧 여자친구에게 보냈던 편 들어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여자친구의 여동생이었고,

언니를 따라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에 들어왔던 것이다.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자매가 닮았기 때문에

나는 마치 여자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을 깨달았고,

더 큰 슬픔이 밀려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동아리 활동을 일절 않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내 다짐은 무색해졌다.

그녀와 같은 수업에서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업이 끝난 후에

내게 다가와 같이 밥 먹자고 했고,

여자친구가 내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처럼

나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알겠다고 했다.

 

다음날 저녁,

둘이 제대로 만났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마치 우리는 몇 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서로에게 익숙했다.

 

그녀는 여자친구와 성격이며

모든 것이 비슷했고 그

녀도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자매가 친구처럼 친했던 까닭에

나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했고,

무엇보다 내가 입대하고 나서

 

2년 내내 쓴 편지에

내 여자친구와의 첫 만남부터

시시콜콜한 내 얘기까지 쓰여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수업도 같이 듣고

시간도 함께 보내며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 또한 커져갔다.

 

평소처럼 그녀와 수업을 듣고

밥을 먹던 어느 날,

무심코 여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그녀를 통해 달래는 나를 발견했다.

 

이는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일부러 그녀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듣던 수업도 나가지 않았고,

혹시라도 그녀를 마주칠까

동아리방이나 그녀의 단과대를 피해서 다녔다.

 

마치 그녀와 몰랐던 사람처럼,

그녀가 원래 내 인생에서 없던 사람처럼

일주일을 보냈고

이 방법은 주효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학과사무실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편지의 주인공은 그녀였고

편지에는 나에 대한

그녀의 솔직한 생각이 담겨있었다.

 

그녀가 처음

언니의 연애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나중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막연한 생각 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2년 넘게 편지를 보내는 모습에

이런 사람의 진심이라면

평생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직접 만나보고 싶은 욕심까지 생겼다고 했다.

 

편지에 내가 동아리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토대로

그녀는 나와 같은 동아리에 가입했고,

결국 나와 만나고 싶다던

그녀의 바람은 이뤄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나와 가까워지면서

혼란스러운 감정이 앞섰다.

 

나라는 사람이 더 좋아지는데

언니의 옛 남자친구를 좋아한다는 것이

석연치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남아있는

언니의 흔적 또한 마음의 짐이었다.

 

지우기도,

그렇다고 내버려두기도

난감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도

섣불리 결정을 할 수가 없어

내 선택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선택은 결국

거리를 두는 것이었고

그녀도 순순히 이를 따랐다.

 

하지만 편지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

 

언니는 잠시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그저 앞으로 우리가 걸을 길을 생각해봐요.

때 내 옆에서 손잡고 웃어줄 수 있어요?’ 라고.

 


나는 마치 머리를 무언가로

강하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평온해진 줄로만 알았던 마음이 요동쳤다.

 

대화할 때 나만 바라보는 예쁜 눈망울,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 등

어쩌면 죽은 언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녀의 참모습을 애써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녀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한데

여태 이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때야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저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정이 있고 6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내 여자친구에서

곧 5월의 신부가 된다.

 

사실 축복받아 마땅한 결혼이고

지금 자체로도 너무 행복하지만

우리 사랑 이야기에는 어딘가

슬픔이 묻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여자친구가 이런 말을 건넸다.

 

“차라리 자기의 전 여자친구가

 우리 언니여서 다행이야.

 다른 여자였으면 내가 얼마나

 질투했을지 상상도 안 가!”


결국 슬픔도 시간이 흐르니 무뎌졌고

남은 행복을 어루만질 수 있게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준 것 같았다.

 


나의 청혼을 받아들인 그녀가

마지막에 조심스레 건넨 말은 이렇다.

 

“어느덧 자기가

 우리 언니하고 만난 시간보다

 나와 만난 시간이 훨씬 오래 됐네."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언니한테 부끄럽지 않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자. ”

이제 내 사랑이야기는

슬픈 영화가 아니라

해피 로맨스 영화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먼저 하늘나라로 간 전 여자친구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남은 인생을

부인 될 사람에게 헌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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