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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이야기

[짝사랑] "너를 보면 녹는 눈사람이었다" [연세대학교 대나무숲 #58437 - 짝사랑 했던 오빠에게 보내는 글]

by 행복을찾아@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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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19 오후 9:33:28, 연대숲 #58437번째 외침:

 

 

나 사실 지하철 타는 거

정말 싫어해.

 

차창 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싫고,

만원지하철에서 한껏 바쁜 사람들한테

이리저리 밀쳐지는 것도 싫고,

 

어렸을 때 큰 소리를 무서워했는데

스크린도어가 없던 시절

지하철이 들어올 때 나던 소리에

귀를 꼭 막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그것도 싫어.

 

대신 나는 이어폰을 꽂고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게

너무 좋아서 버스를 타는 게

지하철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곳을 가도,

 

전광판에 뜬 예상 도착시간이

터무니없이 길어도, 차가 아무리 막혀도,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언제나 버스를 타.

 

 

그러니까

눈 내리던 그 날,

 

눈이 와서 아무래도

찻길은 막힐 것 같다느니

집에 빨리 가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다 핑계였고

 

거짓말을 하면 바로 티가 나는 내가

가까워 오는 버스정거장을 보며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한 대사였어.

 

그냥 역까지 같이 걸어가는 그 길이,

같이 지하철 타고 가는

몇 안되는 정거장만큼의 시간이,

 

시시콜콜하지만

나는 한 마디도 잊어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꿈처럼 기뻐서 그랬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그냥 그만큼의 행운이

나한테도 왔다는 게 너무 좋았어.

 

2호선 반 바퀴를 비잉 둘러서

버스보다도 한참을 더 걸려 집에 갈 때,

지하철을 탄 걸

후회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어.

 

오빠는 페이스북을 많이 하지 않으니까,

이 글을 못 봤으면 좋겠어.

 

혹시 이 글을 읽어도 날 떠올리지 못하고

'글 쓴 애가 짝사랑 하나 보네' 하고

별 생각 없이 지나쳤으면 좋겠어.

 

짝사랑 노래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다니는 주제에,

오빠가 제발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고 바랐어.

 

내 마음이 짐이 될 바엔

나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가도 어떤 날은 그냥

확 들켜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날은 나도 내 마음이 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공감되는 노래를 찾아 들었어.

 

예를 들면 이하이의 희망고문이나

윤종신의 왠지 그럼 안될 것 같아 같은,

그런 노래들.

 

나 이제 더 이상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

장장 9개월에 걸친 짝사랑은

얼마 전에 끝냈거든.

 

근데 있지,

누군가를 떠올리며 듣던 노래는

그 사람에게 주는 노래가 되더라.

 

방금 랜덤재생으로 노래를 틀어 둔 핸드폰에서

희망고문이 흘러나와서,

갑자기 오빠 생각이 나기에

예전에 써 뒀던 이 글을 대숲에 보내려고 해.

 

 

사실은 처음 본 순간부터

언젠가 오빠를 좋아하게 될까봐

불안했다는 고백 아닌 고백과 함께.


좋아했어,

오빠.

 

사실 나는

오빠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녹아버리는 눈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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