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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이야기

이제는 너를,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빵 굽는 냄새를 사랑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너는 어떤 향기를 제일 좋아해?]

by 행복을찾아@ 2021.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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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2016년 2월 12일

 

 

“너는 어떤 향기를 제일 좋아해?”

 

“향기? 갑자기 향기는 왜?”

 

“우리 곧 1주년이잖아. 향수 사주려고.

 내가 조금 알아봤는데...

 플로럴향, 시트러스향을 많이 쓴대."

 

"아쿠아향은 바다를 떠올려주는

 상큼한 향이 나고,

 그린향은 4월의 풀 향을 맡을 수 있대. 그리고..”

 

“있잖아.”

 

마치 명동 로드샵의 판매원이 된 것처럼

이런저런 향의 종류를 늘어놓는

내 말을, 너는 끊었다.

 

“응.”

 

“나는 향수 안 좋아해.”

 

“왜?”

 

“향수의 진한 향이 싫어서. 독해.”

 

“음.. 그래도 남들은 다

 향수 선물 같은 거 하던데?

 그래도 좋아하는 냄새 하나쯤은 있지 않아?”

 

“있어.”

 

“뭔데?”

 

“빵 굽는 냄새.”

 

 

멋이 없었다.

 

그때는 한창 로맨틱한 걸

좋아하던 나이였으므로,

그 관점에서 볼 때 너는

로맨틱하지 않았다.

 

남들은 서로 비싼 향수 선물을 주고받고

페이스북에 당당히 인증도 하던데,

겨우 빵 굽는 냄새가 좋다니.

 

향긋한 향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친구들한테도 물어보고

여기저기 알아도 봤는데.

 

솔직히 나는 실망했었다.

 

 

결국 우리는 1주년이 되는 날,

함께 베이커리에 빵을 구우러 갔다.

 

반죽을 하고, 이스트를 넣고,

취향대로 치즈나 초콜렛을 넣었다.

 

우리가 만든 빵이 오븐에서

노릇노릇 구워질 때,

 

너가 좋아하던 빵 굽는 냄새가

베이커리에 서서히 퍼졌고,

너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눈을 감았다.

 

한 손은 맞잡고,

다른 한 손은 빵을 넣은 황토색 종이봉투를 쥐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네게 물었다.

 

“빵 굽는 냄새가 왜 좋은 거야?”

 

“음... 정확한 이유를 말하기는 힘들어.

 만약. 만약, 영화 투모로우처럼

 온 세상이 얼어버렸다고 상상해봐.

 그냥 겨울날씨가 아니야.

 온 몸이 깨질 듯이 추운거야.”

 

‘깨질 듯이’를 말하면서 너는

정말 내 손 마디를 꼬집었다.

 

“전 세계가 얼음 덩어리로 변한거야.

 그리고 너는 얼어버린 길거리를 배회해.

 주변에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이.

 희망이 없는 거야."

 

"그러다가 너는 골목 구석에서

 노란 불빛을 발견해.

 힘겹게 달려가서 문을 열지.

 문을 열었어. 뭐가 있는 줄 알아?"

 

"네 눈 앞에는 잉걸불이 가득한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가 있는 거야.

 한쪽에는 평생 쓰고도 남을

 장작더미가 쌓여있고.

 좋겠어? 안 좋겠어?”

 

“그거야 당연히 좋을 것 같은데..?”

 

“그치. 그래서 나도 빵 굽는 냄새가 좋아.”

 

 

 

 

“혹시 필요한 것 있으세요?”

 

또 한참을 서 있었나 보다.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고,

길을 가지도 않고, 멍하니 문 앞에 서 있는

손님의 정체가 신경 쓰여,

빵집 주인은 아마 알바생을 내보냈을 것이다.

 

한-두 번이 아니다.

수십 번째 겪는 일이다.

 

나는 너와 헤어지고 나서도,

어디선가 빵 굽는 냄새가 나면

이렇게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것은 내 몸에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들게 된 뒤로부터,

나를 둘러싼 세상에는

온갖 화려한 향이 가득차고 있다.

 

너도 나도 서로 다른 진한 향을 통해

본모습을 덮고,

서로의 코를 이리저리 찌르며 괴롭힌다.

 

향기로워 보이는 미소의 입꼬리가,

한순간 날카로운 칼이 되어

등 뒤에 꽂히는 세상이다.

 

세상은 얼었다.

나는 얼어버린 세계를,

버림받은 썰매개 마냥 떠돈다.

거리를 부유한다.

 

이렇게 차가운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내가 남들보다 추위에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가끔씩 길가 모퉁이에서

풍겨오는 빵 굽는 냄새.

 

그 냄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를,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빵 굽는 냄새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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