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업적은 세종을 왕으로 세우고 왕권 강화를 위해 싹수 보이는 놈은 다 죽였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이방원과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술상을 앞에 놓고 자리하였다.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던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한 이 자리에서 이방원은 먼저 시 한 수를 읊었다. 우리네 세상살이 중간중간에 부딪치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시를 잠깐 짬을 내어 감상해보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라고 하는 것이다. 정몽주에게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굽힐 것을 권유하면서, 자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방원다운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표현이다. 그러자 정몽주가 이방원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들고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丹心歌)’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시구를 통해 정몽주의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전부터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방원이었기에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지교(후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에서 정몽주를 살해하며, 이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국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 그는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처치하는 거사가 성공한 뒤 남은ㆍ정도전ㆍ조준 등 52인과 이성계의 추대를 협의하고, 공민왕비 안씨를 움직여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연 것이다. 새 왕조를 여는 데 있어 이방원은 중요한 고비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새 왕조를 개창한 뒤, 아마도 이방원은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개인적인 능력이나 중망으로 보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좌절의 아픔을 주었다.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좌절은 태조 초에 이루어진 개국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이방원은 이후에도 계속 정치에서 소외되며 정도전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예를 들어 모든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자고 청하기도 하였고, 왕자 및 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겠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을 비롯한 정적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의 대세는 이방원에게로 옮겨갔다. 이방원으로서도 바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 정도전 등의 제거가 권력욕으로만 비추어진다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일단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인 영안대군 방과(제일 맏형은 진안대군 방우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임)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그가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이었다. 정종 즉위 후 방원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고, 정종이 재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방원이 차지하게 되니, 그가 바로 태종이었다. 태종은 왕세제 시절 사병을 혁파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려고 할 때 반발하던 그가 왕위에 올라서는 이를 혁파하였으니 말이다.
태종은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 축출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인물은 이거이(李居易, 1348~1412)였다. 태조 대(代)의 무장으로, 그리고 태종과 혼인 관계로 맺어져 영의정까지 지냈던 이거이였으나 사병 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다. 그는 당대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던 인물이었다.
이어 태종의 화살은 자신을 그토록 도왔던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 민씨의 집안으로 겨냥되었다. 외척으로서, 그리고 태종을 도와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기에 그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원경왕후 집안의 4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연속이었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아버지로서 비장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주기 2개월 전에 있었던 일로,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었다. 관리들이 세자의 폐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왕과 교감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 태종은 천명임을 강조하면서, 후계자를 어진 이로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라고 그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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