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나무숲 이야기

[사랑, 이별] 나의 첫 연애는 CC였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달달한 첫사랑 이야기)

by 행복을찾아@ 2021. 2. 3.
728x90

나의 첫 연애는 CC 였다.

 

그것도 우리 과에서 처음 탄생한 CC.

공교롭게도 첫 연애인 건

내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CC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게감을 가진 건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손부터 잡았다.


우리의 어리버리한 연애는 금방 티가 났고,

곧 모든 과의 사람들이

우리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연애 사실을 공표해버린 날,

나는 내 생애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고,

그제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성급한 공개연애를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조용히 연애를 했다.

 

같은 수업을 듣긴 했지만 옆자리에

묵묵히 앉아있었을 뿐이었고,

데이트의 유혹을 누르고 과 친구들과

다같이 학식을 먹은 것도 여러번이었다.

 

아주 쉬운 일이었다.

우린 원래 친구였으니까,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건 정말 쉬웠다.

그런데 그 애는 아니었나보다.

 

남자친구는 어느날

내가 자신을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싸우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나는 정말 남자친구의 말대로

내가 그를 사실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이라서, 서툴러서

우정과 연애감정을 착각했나보다,

좋은 친구였는데 다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울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 다음 날 과엠티는 나 혼자 떠났고,

남자친구는 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행방을 묻는 말에

그냥 얼버무리고 술을 물처럼 마셨다.

이젠 전남친이라고 불러달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 애가 왔다.

약속 끝나자마자 왔다면서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웃는 그를

나는 밀어낼 수 없었다.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잠들지 못한 그 날 새벽,

남자친구는 날 붙잡고 울었다.

 

네가 두려워 하는 걸 안다고,

하지만 곁에 있겠다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러니 너도 쉽게 포기하진 말라고.

 

그래, 난 두려웠다.

사람들의 시선도, 알듯말듯한 내 마음도,

처음 경험해보는 감정과 새로운 관계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작정 시작한 이 위험한 관계가

내 대학생활과 친구관계, 어쩌면 평판까지 모든 걸

무너뜨릴 지도 모른다는게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서 실수할까봐 섣불리 표현하지도 못하고

언제나 한 발짝 뒤에서

상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나보다.

 

그 애라고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을텐데.

서툰 연애라고, 실수하는 관계라고

진실되지 못한 것은 아닌데.

 

나는 우리가 처음 사귄 그 날처럼

남자친구의 손을 붙잡고 약속했다.

 

실수하고 넘어지겠지만,

경험 삼아 해보는 연애라는 핑계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 후로 우리 과에는 다른 CC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마법처럼 다른 이들의 부담스러운 관심도 옮겨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조용한 연애를 했다.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래도 반드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는 점 정도.

 

계절이 바뀌고 많은 커플들이 깨질 때 즈음

사람들은 문득 우리가 아직도 만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묻곤 했다.

 

그러다 남자친구가 군에 입대하게 되자,

사람들은 정말 우리가 헤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모든 CC가 깨진 후에도

우리는 계속 사귀고 있었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여전히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헷갈려하면서.

 

 

며칠전 말년 휴가를 나온 남자친구에게

오래된 질문을 다시 물었다.

 

이젠 내가 널 좋아하는거 알겠냐고.

그랬더니 이 괘씸한 녀석이 영 모르겠다면서

빙글거리기에 탁자 아래로 한 대 걷어차주었다.

 

그 서툴고 수줍던 연애초보 둘이 이젠

서로 놀려대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서 투닥거리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좀 더

연인다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친구 같아진 듯도 하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연애를 잘 하고 있는 건지,

이게 보통의 연인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는 걸 이젠 안다.
뭔지도 모르면서 시작한 관계는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툴지만 같이 서툴렀기 때문에

누가 옳고 그른지 몰랐고,

그래서 이기려 들지 않았기에

둘 다 이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우린 여전히 어리버리한 커플이다.

나는 아직도 애교를 부릴 줄 모르고,

남자친구는 아직도 여자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를 줄 모른다.

 

하지만 대신 나는 남자친구의

목소리만 듣고 기분을 알아차리고,

남자친구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걸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연애의 일반론에 있어

우리는 표본이 하나뿐인 초보지만,

그래도 천천히, 대신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곧 전역이다.

내가 혹시 제대와 동시에 찰 생각이라면

미리 페메라도 보내서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라고 했더니

남자친구가 헛소리한다고 비웃는다.

 

얼마 전에 군대 간다고

울던 애가 맞나 싶다.

 

남자친구가 복학하면

우리는 다시 CC가 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첫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은 아니라 하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법도 없다는 걸 이젠 아니까.

 

아니, 사실은 그 어떤 사랑도

실패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배웠으니까.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