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 편안한 와인
우리나라에서는 와인을 '공부해야 할 술', '법칙에 따라 마셔야 하는 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와인 한 잔에 담긴 맛과 향, 지역·연도별 특성이 무궁무진하고, 와인에 따라 음미하고 보관하는 법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까다로운 서양 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입맛에 맞는 와인을 시작으로 간단한 기초 상식부터 접근하면 와인에 대한 거리감도 쉽게 좁힐 수 있다. 와인을 시작할 때, 알면 좋을 사항들을 정리했다.
와인의 포도
와인을 만드는 포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포도와 다르다. 식용 포도는 과육을 먹기 때문에 껍질은 얇고 수분이 많다. 하지만 와인용 포도는 색소와 향을 많이 추출해야하기 때문에 껍질이 두껍고 탄닌의 충분한 공급을 위해 씨가 많아야 한다. 또한 어떤 포도 품종을 쓰느냐에 따라 와인의 맛이 달라진다.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은 몇개 품종만 알고 있으면 와인을 고를 때 참고할 수 있다.
와인의 맛
(1) 당도
와인의 당도는 잔여 당분에서 나온다. 포도과즙은 발효되면서 알코올로 바뀌는데 이 때 바뀌지 않고 남겨진 당도를 잔여 당분이라 한다. 당도에 따라 와인의 맛은 '매우 드라이'부터 '매우 스위트'까지로 표현할 수 있다.
(2) 탄닌
와인을 마셨을 때 텁텁한 맛, 떫은 맛이 느껴지는데 이는 탄닌 때문이다. 탄닌은 포도 껍질과 포도 씨, 포도 줄기로부터 얻어지는 항산화 물질로, 주로 레드 와인에서만 맛볼 수 있다. 화이트 와인에는 탄닌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화이트 와인은 씨와 포도껍질을 제고하고 포도즙을 발효시키기 때문이다. 탄닌의 양에 따라 레드 와인의 맛이 실크나 벨벳처럼 부드럽기도 텁텁하고 거칠게 느껴지기도 한다.
(2) 산도
와인의 신맛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신맛은 와인에서 중심이 되는 맛이다. 와인의 산도는 포도 알맹이에서 나오는 주석산, 사과산, 구연산에 의해 결정된다. 대부분 Ph 2.5~4.5 정도이다. 포도 열매가 익을수록 와인의 산도는 덜해진다.
(3) 바디감
와인의 진한 정도와 점성도, 무게감을 얘기하는 와인 테이스팅 용어이다. 와인에 포함된 타닌, 알코올, 글리세린 등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바디가 무거워진다. 프랑스 와인 중 보르도 와인은 풀바디, 부르고뉴 와인은 미디움 바디, 보졸레 와인은 라이트바디이다.
(4) 피니쉬
마신 와인에 대한 뒷맛, 와인을 마시고 난 뒤 남는 와인에 대한 느낌 여운을 가리킨다. 좋은 와인일수록 피니쉬가 길다.
와인 잔은 대개 몸통이 불룩하고 입구가 좁다. 불룩한 모양은 와인 향이 피어오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고, 좁은 입구는 그 향을 가둬두기 위함이다.
현재와 같은 와인 잔을 처음 디자인한 건 오스트리아 와인 잔 제조업체 리델(Riedel)사. 이 회사의 오너 게오르그 리델(Riedel)에게 "딱 하나만 구매한다면 어떤 와인 잔을 골라야 하느냐"고 묻자 "그런 잔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와인을 그냥 마시기만 하려면 잔도 필요 없지요. 병째 마셔도 되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가 와인을 마시는 건 와인 맛을 즐기기 위해서죠."라고 덧붙였다.
보르도 와인글라스
볼이 긴 튤립 형태로 모든 림이 볼보다 살짝 좁고 충분히 열려 있다. 높은 타닌과 바디감이 강한 레드 와인에 어울리며, 화이트와인은 피해야 한다. 일반적인 레드 와인 잔이 이 보르도 와인 잔과 가장 비슷한 형태로 크기만 살짝 작다.
부르고뉴 와인글라스
볼이 많이 나오고 림이 좁은 형태로 와인 향을 모아주는 효과가 탁월한 잔이다. 부르고뉴 와인에 가장 적합하지만, 화이트 와인이나 어린 레드와인을 따라마셔도 좋다.
그랑 부르고뉴 와인글라스
좁아졌다 넓어지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꽃향기와 포도 자체의 향인 아로마를 모았다가 림으로 올라오면서 와인이 숙성되는 향인 부케를 퍼지게 한다.
플루트 샴페인 글라스
샴페인을 맛보기 가장 이상적인 잔이다. 탄산을 유지시켜주기 위해 길고 좁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화이트 와인 잔
화이트 와인은 차게 마셔야 하는 와인이므로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도록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레드와인 잔에 비해 볼의 크기가 작다.
디저트 와인 잔
일반 레드와인 잔에 비해 크기만 작은 잔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
세계적으로 널리 재배되고 가장 많이 알려진 레드 와인 품종이며 프랑스 보르도(Bordeaux)가 원산지다. 껍질이 두꺼워 탄닌이 많고, 이 때문에 수십 년 보관할 수 있다. 이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진지하고 강한 느낌의 맛과 향을 지닌 풀바디이다.
메를로 (Merlot)
카베르네 소비뇽에 비해 부드럽고 풍만한 느낌이다. 마시기에 부담이 없어 인기가 높다.
피노 누아 (Pinot Noir)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으면서 세계적으로도 사랑받는 품종이다. 껍질이 얇은 품종이라 색이 옅다. 색이 옅은 만큼 산도가 많고 여린 편이다. 부르고뉴(Bourgogne)지역에서 난 품종은 가격이 비싸다. 거의 모든 모임과 식사에 어울리는 쉬운 와인이다.
시라 (Syrah)
코를 찌르는 강렬한 풍미와 육중한 무게를 지녔다. 블랙베리, 후추, 가죽이나 트뤼플 등이 복합적인 향을 가지고 있어 풍미가 진하고 강하다.
샤르도네 (Chardonnay)
화이트 와인 품종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품종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데 쓰이며 샴페인을 만들 때도 이용된다. 꽃향과 과일향이 강하지만 크리미한 느낌을 준다.
소비뇽 블랑 (Sauvignon Blanc)
소비뇽 블랑에서 '소비뇽 Sauvignon'은 프랑스어로 야생이란 뜻을 가진 'Sauvage'에서 가져왔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은한 허브향을 가져 활기가 느껴지는 품종이다. 마시기 편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슈냉 블랑 (Chenin Blanc)
샤르도네처럼 잘 길들여진 맛이 아니라, 허브, 부싯돌, 초원의 풀 등의 향이 풀풀 풍기고 부드러움과 청량한 맛이 특징이다. 입 안에서 퍼지는 부드러움 때문에 스파클링 와인, 드라이 와인, 세미 드라이 와인까지 다양한 와인을 만드는데 쓰인다.
리슬링 (Riesling)
와인 전문가들에게 샤르도네와 함께 화이트 와인의 2대 품종으로 꼽힌다. 잘 익은 복숭아나 살구와 같은 과일 향과 오일리함이 느껴지는 맛이다. 리슬링으로 만든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아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도 쉽게 추천할 수 있다.
와인병과 병마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포도 품종과 재배 지역, 생산 방식 말고도 와인 맛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와인병'과 '병마개'다. 더 정확히는 병마개의 종류와 와인병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코르크 마개 vs 스크루캡
똑같은 와인이라도 어떤 병마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숙성 과정에서 맛 차이가 생긴다. 코르크 마개는 액체 밀봉 효과는 뛰어나지만 공기 밀봉 효과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또 나뭇결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개마다 차단 효과도 일정하지 않다. 반면 스크루캡은 액체뿐 아니라 공기도 99% 이상 차단한다.
큰 병 vs 작은 병
같은 와인을 서로 다른 크기의 와인병에 숙성시켰을 때도 맛이 달라진다. 와인 숙성은 공기와 얼마나 접촉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반 병(half bottle·용량 375mL)', '더블매그넘(double magnum·3000mL)' 병에서 각각 숙성된 레드와인은 병목에 있는 공기의 양은 거의 같지만 와인의 부피는 8배 이상 차이 난다. 작은 병에 담긴 와인일수록 산소와의 접촉이 많아 빨리 숙성되고 떫은 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약해지면서 부드러워진다. 큰 병에 담긴 와인은 천천히 숙성되므로 더 높은 복합성과 품질을 얻을 수 있다.
한국 속 와인
와인을 서양 술로만 생각해 제조과정과 문화를 서양의 기준에만 맞춰서 생각하면 오산이다. 와인은 의외로 한식과도 잘 어울리는 술이며, 우리나라에도 와인을 직접 제조하고 즐길 수 있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와인에 대한 편견을 깨줄 음식 궁합과 우리나라 지역 와인 몇 가지를 소개한다.
와인과 한식
와인의 음식 매칭, 즉 마리아주(mariage)의 기본은 유사성과 상반성이다. 비슷한 맛을 내는 음식과 와인을 함께 곁들이면 풍미가 극대화되면서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반면 다른 특징을 가진 음식과 매칭하면 서로 부족한 맛을 채워주면서 보완적인 관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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