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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스토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미래에서 기다릴게.'라는 외침이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한동안 울었다.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24247]

by 행복을찾아@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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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12月16日#24247번째포효

 

 

고대숲에 넘쳐나는 달콤한 연애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왠지 그중에서 하나 정도는,

당신이 내게 쓴 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신은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페이스북을 잘 하지 않는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고대숲의 글들을 정독한 건 그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였을 거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겨냥하고

쓴 것만 같은 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착각을 잘 하는 내가

아예 '없다'고 단언할 정도면 말이지.

 

그래서 내가 쓰기로 마음 먹었다.

당신이 썼을 나의 글을 찾기를 그만 두고,

내가 당신의 글을 쓸 것이다.

 

그래,

당신에 대한 글을 쓴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베어내야 할까.

 

아마 지금보다 더 추웠던 날의

당신과의 첫만남이겠다.

 

 

올해 나는

고려대에 재수 끝에 합격했다.

 

원체 시끄러운 단체 만남자리를

좋아하지 않고

술이라면 진절머리가 났지만

 

나는 그래도 새내기답게

모임에 나가야 겠지 싶어

처음으로 입학 전 술 모임에 나갔다.

2월의 초입이었다.

 

그때 당신을 처음 봤다.

당신은 나의 선배였다.

 

나는 그 어지러운 술자리의

일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당신을

처음으로 어렴풋 보았던 것 같다.

 

"미안, 내가 선배는 처음이라~!"며

익살맞게 새내기들의 어색함을 풀어주는

당신은 뭔가 숙달된 '프로 선배' 같았다.

 

여자아이들은 곧잘 당신을 언니언니, 하며 따랐고

다른 남자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의 첫인상은 거기까지.

 

눈에 띌 만큼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갈색 긴 생머리와 동글동글한 이미지,

술이 들어가자마자 발갛게 상기되는 얼굴,

딱 그 정도.

 

 

당신은 나와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얼마 없었던 선배라 그런지 눈에 익었다.

 

당신은 이미 마실대로 마신 것 같은데

계속 "새내기들은 술 그만 마셔!"라며

새내기들의 잔을 뺏어마셨다.

재밌었다.

 

당신은 한없이 유쾌하고

재밌고 행복한 사람 같았다.

 

투덜투덜 짜증을 부려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를 않았고

당신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말을 쉽게 걸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당신보다 어렸으면

살갑게라도 누나, 한 번 불러볼 텐데

나는 꺾인 새내기였고

당신과는 동갑이었다.

 

그 술자리에서,

나는 당신이 내게 처음

말을 걸었던 때를 기억한다.

 

술자리는 계속 되고

나는 우연히 당신 곁에 앉았다.

 

당신은 뺏어 먹은

새내기들의 술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었지만서도

침착한 말투였다.

 

당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곤히 내게 말을 붙였다.

 

"이름이 뭐예요?

 아, 그렇구나."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기억,

그리고 당신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되읊는 내 이름 석 자.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나 답지 않게 어버버했다.

 

그때 나도 처음으로 당신 이름

석 자를 입으로 되뇌었다.

 

 

그 이후로 나는 당신에게

존대할 때는 "선배"라고,

또 반말을 할 때에는 "XX아"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행복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왠지 친해지고 싶었다.

 

예상대로 당신은 주변에

아주 많은 친구가 있었고 사랑을

듬뿍 받는 빛나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페이스북은

친구들의 사랑으로 넘쳐났고

하루가 멀다하고 바쁜 당신은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

 

매사에 일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당신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런 당신을 궁금해했고

조금은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보이는 과 행사에서

당신과 친근한 말투로 투닥거리는

남자선배가 부러웠고,

당신과 밥을 먹었다고

사진을 자랑하는 동기가 부러웠다.

 

나는 당신에게 그저 많은 후배 중 한 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내 마음은,

조각난 별 파편이 행성을 맴돌듯

처연히 그대 주위를 맴돌았다.

 

 

당신과 개인적으로 닿을 기회는

우연한 때에 찾아왔다.

 

예컨대 '혹시 그 수업 듣니?'와 같은

우연한 카톡 한 마디가

우리 대화의 발단이 됐다.

 

평소 당신 성격과 비슷하게

카톡 말투도 유쾌했다.

 

당신은 나와의 카톡에서 잘 대답해주고,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나는 나에게만 그런 것이라 믿고 싶었다).

 

나는 21년 평생을 살면서 평소답지 않게,

유치한 행동들로 당신과 연락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잠들 것 같으면 일부러

다음날 답장을 한다든지,

비행기모드로 카톡을 미리 읽는다든지.

 

당신은 언제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정갈하게 지키는 카톡을 보냈다.

 

휴대폰 액정이 불을 밝히고

선배의 답장이 뜰 때면 왠지

온몸이 간지럽게 베베 꼬였다.

 

때문에 나도 당신에게

답장을 보낼 때면 자음 하나,

모음 하나 엇나가지 않게

정성스레 자판을 눌렀고,

 

그 버릇은 나에게 익어버렸다.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당신과 처음으로

단둘이 술을 먹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한 손으론 우산을 들고 쭈볏대는

내 어깨를 당신은 툭, 치며 말했다.

 

"오늘은 이 선배가 사는 날이니까

 비싼 거 먹자, 그래봤자 술이겠지만!"

 

해사한 미소였다.

 

나는 한층 풀린 마음으로

셔츠깃을 매만지며 당신 앞에 마주앉았다.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라

맥주를 따르는 손이 왠지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이어진 카톡처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내 얘기에 당신은 귀 기울이고,

당신 얘기에 나는 미소지었다.

 

이야기는 계속 됐지만

당신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당신은 연거푸 소맥 세 잔을 비웠다.

 

새내기들 앞에서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던 당신이

내 앞에서 취해버린 것이다.

 

그리곤 울었다.

소리없이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다.

 

당신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정말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사람이

결국 잔인하게 당신을 떠났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쩐지 그 사람이 악에 받칠 만큼

미우면서도 고마웠다.

 

그런 나쁜 사람이

당신의 곁에서 떠나준 게 고마웠고,

덕분에 당신이 감정을 참지 않고

 

내게 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어 고마웠다.

참 이기적이고 어린 감정이었다.

 

또 당신은 얘기했다.

 

"나는 내 스스로가 밉고 못났고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건 사실이야.

 아무도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주지 않아."

 

나는 그때 알았다.

늘 빛나고 행복하게만 보이던 당신은

누구보다 힘들고 슬픈 사람이었다는 걸.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가혹하게 옥죄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웃음 뒤에는

난도질당한 자존감이 고개를 숙이고

숨어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날 이후로 당신은

내 마음에 자리잡았다.

 

첫만남부터 가랑비에 옷 젖듯

당신을 좋아하게 되어 결국 정신 차려보니

흠뻑 젖어버린 걸 깨달은 걸 수도 있다.

 

어느 노래가사처럼

나는 여자는 잘 알았어도 사랑은 몰랐다.

 

풋사랑 같은 연애는 꽤 해봤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에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몰랐다.

 

처음 사랑이 찾아온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지금 반추해보자면

어쩌면 당신을 진정으로 '

사랑'했는지조차 잘은 모르겠다.

 

나는 그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당신은 정말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사람이란 것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는 것을.

 

 

그 이후로도

나는 당신을 자주 보았다.

 

우리 사이는 공통적으로 친한 사람도,

또 우연히 마주칠 일도 없는 사이지만

우리는 밥을 몇 번 더 먹고,

핑계를 대서 일부러 얼굴을 보았다.

 

내 밴드동아리 공연에

당신을 초대하기도 했다.

 

당신과 가까운 듯하면서도

거리를 유지하는 연락을 주고받을 때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당신이 아플 때면 약을 사 들고

당신의 자취방 앞에 살며시 두고 왔으며,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로

플레이 리스트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먼저

내게 커피를 들고 찾아오고는 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힘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날 당신은 스스로를

'나쁜 사람'에서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고

당신의 그 말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런 나날은 영원 같지만 찰나였다.

그리고 아릴 만큼 달았다.

 

달큰한 복숭아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는데,

과즙이 철철 흘러 어찌할 줄 모르겠는,

그런 기분이었다.

 

12월, 겨울이 오고

나는 내 옆에서 걷는

조그마한 당신의 커다란 패딩 속에

파묻힌 작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지만 끝내 붙잡지는 않았다.

 

 

이게 당신과 나의 이야기의 전부다.

 

마치 한 이야기의 반 정도를

잘라내어 버린 것만 같이 싱거울 수 있다.

 

나의 마음은 이렇다.

당신을 이다지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어떨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이제 당신을 멀리하려고 한다.

 

그게 당신을 위한

나의 유일한 배려이다.

 

나의 사랑은 어차피 시한부였다.

나는 그저 당신 주위에서 맴돌 뿐,

그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도 못했다.

 

그대는 어느 순간 내게 사랑

그 이상의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내 사랑을

가슴에 묻어버리려고 한다.

 

나는 그저 내 사랑이

당신이 살아가는 데 한 보탬이 되었길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종강,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 이제 닷새만 지나면,

이런 밤을 다섯 번만 더 보내면

나는 그대를 보지 못한다.

 

어쩌면 당신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서도

당신을 마주칠 수 없을 수도 있다.

 

곧 당신은 먼 나라로 떠나고,

당신이 그 나라에서 돌아오고 나면

나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군대에 가 있을 것이다.

 

내가 2년이 지나 다시

안암에 발을 디딜 때에는 당신은

안암을 떠나 사회로 나갈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 있지 못한다.

나는 당신보다 영원히 몇 걸음 느리다.

 

그래서 나는 내 욕심으로

당신을 붙잡을 수가 없다.

 

당신의 눈부시게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가끔씩은 당신의 미래 속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좋으니,

내가 있었으면 하고

소망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리는 미래는

당신 그 자체였지만,

당신의 미래 속에 나는 있을 리 없으니까.

있으면 안되니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미래에서 기다릴게.'라는 외침이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한동안 울었다.

 

나는 그 기약없는 먼 나중을 생각하며,

당신의 미래와 나의 미래가 언젠간

조금이라도 스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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