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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스토리

[사랑] 넌, 내게 나무같다. 내게 그늘이 되어주고, 열매를 주고, 날 위해서라면 너를 꺾어 장작이 될 수도 있는 나무.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by 행복을찾아@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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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나무숲 - 2018년 8월 6일

 

 

너의 결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은 빨라서

무더운 여름의 기세도 곧 한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겠지.

 

그러면 그때

넌 그 가을에 결혼하겠지.

 

 

우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났다.

같은 반, 나는 반장, 너는 부반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10살 꼬마들이 학급임원이랍시고

했던 것도 없지만 나름 가까웠다.

사이 좋은 친구였다.

 

그러고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다시 같은 반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진 모르지만 꽤나 친했다.

 

서로에게 가장 친한 이성친구를 묻는다면

모두가 고민조차 하지 않고

서로를 꼽는 그런 사이었다.

 

사귀냐는 오해도 몇 번 받았었다.

 

사실 중학교 1학년 땐

이성으로서의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을 네게 가지고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면서,

공부를 잘하고,

꽤나 잘생겼었으니까.

 

그 짧은 감정은 생각보다는 한순간이었고,

난 널 좋아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릴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너의 장점은 나만 발견한 게 아니라서

넌 인기가 있었고,

여자 친구가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훨씬 많았다.

 

나도 나름 인기가 있어서,

남자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남사친 여사친의 정석이었다.

 

평소에 연락은 많이 하진 않지만

서로 필요할 땐 부담없이 먼저 전화할 수 있고,

상대가 연인이 있다면

과도한 친근감의 표현은 자제하고

서로의 연애에 오지랖부리지 않았다.

 

 

고등학생 땐 정말 바빴다.

둘 다 공부를 잘했고,

대외활동도 활발했다.

 

넌 전교 회장이었고,

난 동아리 회장과 학생회 일을 했다.

 

나는 1학년 때 사귄 남자친구와

2년의 교제 끝에 헤어졌고,

넌 의외로 고등학교 와서는

연애를 하지 않았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넌 굳이 라고 대답했다.

그냥 그랬다.

 

 

우린 친했다.

시험기간엔 함께

카페에 갔다가 노래방에 가고,

야자가 끝나고 소나기가 오면 함께

네 우산을 쓰고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났다.

정말 신기하게, 우리는 함께 서울대에 합격했다.

모두가 기뻐하며 우리를 축하해주셨다.

 

우리 부모님과 너희 부모님들은

서로 친해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었다.

신기하고 즐거웠다.

 

대학 와서도 너랑 친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즐거웠다.

 

새내기 땐 많이 바빴다.

우리 과는 술을 많이 먹는 과였고,

나는 유전적으로 술을 좋아했다.

 

막차를 타려고

비틀대며 술자리에서 일어나면

넌 날 위해 지하철역에서 기다려주었다.

 

30분 가량을 함께 지하철을 타고

내가 아무말이나 해대면

넌 묵묵히 내말을 듣다가

인상을 쓰고 꿀밤을 때리며

시끄럽고 조용히나 하라고 하곤 했다.

 

술좀 작작 먹으란 말도 했다.

난 그러면 할말이 없어서

그냥 배시시 웃어넘겼다.

 

너의 집은 지하철역 바로 앞이었고,

우리 집은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오면

버스는 끊겨있었기 때문에

난 항상 걸어가야 했고,

 

넌 30분을 걸어서

날 데려다주고

다시 30분을 걸어서

집에 돌아가곤 했다.

 

난 너한테 고마워하면서

밥을 사준다고 했는데

넌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항상 거절했다.

친오빠같았다, 넌.

 

 

 

 

첫 한학기가 끝나고 방학이었다.

스무 살의 여름에 난 혼자

배낭여행을 가고 싶었다.

 

유럽이라던가 미국,

그런 큰 관광지 말고,

좀 더 덥고, 낭만적이고,

고독한 곳에.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해서,

난 몽골로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혼자 여행하는 것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너도

몽골 여행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고,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다.

 

너와 함께라면

부모님들은 항상 찬성이셨다.

그렇게 2주가 좀 넘는 몽골 여행을 갔다.

 

몽골은 아름다웠다.

밤에 평야에 앉아 석양을 보고,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걸었다.

 

눈을 감고 더위를 느끼면서,

내 살갗에 와닿는 태양을 느끼면서 걸었다.

넌 내 옆에 있었다.

 

몽골 여행 마지막 날에 맥주를 사서

숙소에서 함께 맥주를 먹으며

얘기했던 게 선명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연애 얘기가 나왔다.

 

나는 대학에 온 직후에

미팅으로 타대 선배와

짧은 만남을 가지다가 헤어졌다.

 

너는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연애를 하지 않고 있었다.

 

10년 동안 친구였다는 건,

서로의 연애사는 얕게라도

전부 다 안다는 뜻이다.

 

우린 서로의 전 애인들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놀리고 웃었다.

 

맛있는 맥주와,

뜨거운 여름의 밤바람,

창 밖으로 선명한 별들, 달들, 풀들, 평원...

 

아름다웠고, 어쩌면

그 낭만에 취해서 난 평소라면

굳이 안했을 말을 꺼냈다.

 

나 솔직히 열네 살 때

너한테 좀 관심 있었는데- 라며.

 

웃으면서 맥주를 들이키고 다시

너 얼굴을 봤을 때 네 표정이 묘했다.

 

난 웃으며 네 어깨를 살짝 쳤다.

야 이젠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넌 살짝 더듬으며 말했다.

난, 너한테 지금 관심 있는데.

 

 

약간은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가

술자리를 정리하고 잠에 들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둘 모두

어젯밤의 대화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너는 좀 더 다정해졌고,

좀 더 날 기다렸다.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상담을 했다.

 

내가 걔의 그런 마음을

전혀 몰랐다고 말하자,

친구는 오히려 놀라면서

그걸 몰랐냐고 되묻더라.

 

나만 빼고 모두 아는 그런 거였다.

그건. 선생님들, 친구들,

부모님들마저도 아셨다고 했다.

 

내가 바보같이 헤실거리며 웃고 있으면

그 앤 항상 내 뒤에서

내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고 있었다.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면

알게 모르게 표정이 굳어서 우울해하고.

소나기가 올까봐 매일 사물함에

커다란 우산을 넣어두고 날 데려다주고.

 

얘기를 하다보니 느꼈다.

내가 눈치가 없던 거구나.

 

혹은, 그 애를,

그렇게 상상하지 않아서,

몰랐던 거구나.

 

 

그뒤로 몇 달 동안,

말하자면 썸을 탔다.

 

예전과 다른 건 없었지만,

넌 좀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했고,

난 네게 흔들렸다.

 

너가 그렇게 행동하는데

가슴 떨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거야.

 

첫눈이 오던 1학년 겨울,

나를 데려다주는 우리 집 앞 벤치에 앉아서,

너는 내게 사귀자고 했다.

 

그때 너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우리가 알게 된 지 10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너는 내 인생에서 문자 그대로 절반을 차지해.

 

앞으로의 내 인생에

너가 가득했으면 좋겠어.

널 모르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10년보다 길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때가 스무살...

 

28살의 가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지.

 

너무 이를 수도 있다.

널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18년이다.

 

너가 없는 나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8년간 넌 한결같았다.

어쩌면 10년 넘게 넌 한결같았다.

 

넌, 내게 나무같다.

항상 그 자리에 서서 날 기다려주는, 나무.

 

팔을 가지처럼 뻗고

내가 안기기만을 기다리는 나무.

 

내게 그늘이 되어주고,

열매를 주고,

날 위해서라면 너를 꺾어

장작이 될 수도 있는 나무.

 

내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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