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해? 영화나 볼까'
미리 할 말을
다 준비하곤 전화를 겁니다.
근데 어쩐 일인지 통화 연결음이
채 시작도 되기전에 그녀가
전화를 냉큼 받습니다.
'어'
반가움이 더럭.
'응?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받지.
어디야? 영화 한편 볼까?'
그런데 그녀가 선뜻.
'그럴까? 뭐 재밌는 거 있나'
모든 게 잘 풀리는 기분.
미리 생각해둔 영화를 보자고 하고
티켓을 예매하고
카페에 앉아 조금 기다리니
금방 그녀가 나타납니다.
예상과는 좀 다른 모습.
화장은 분명 안 한 것 같고
야구모자에 그 위에 또 후드 티까지 덮어 쓴
참 ... 소탈한 차림?
양복에 트렌치 코트를 입은 내가
좀 튀는 것 같아 머슥하기도 하지만
뭐 일단은 마냥 반가운 마음.
'야 오늘은 뭔가 다 빠르네
전화도 걸자마자 받더니
너 내 전화 혹시 기다린 거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내 농담 아닌 농담에 그녀는
웃어주지도 않고 한숨부터 쉽니다
'아... 그냥 다 귀찮아서
추리닝 바지만 갈아입고 나왔어.
예쁘게 보일 사람도 없고 뭐...
아까 너 전화했을 때
나 전화번호부 보고 있었거든.
쭉 보는데 진짜 아무도 없더라.'
그 말에
내 마음 속 부풀었던 풍선은
바람이 빠지기 시작하고..
'정말 전화번호를 다 봐도
전화하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 있지.
옛날 남자친구 번호라도 좀 남겨놓을 거 그랬나'
그 말에 마음 속 풍선은
달걀만큼 작게 볼품없이 쪼그라들고
그리곤 그녀의 다음말.
'참, 너 소개팅 할래? 너도 누구 없잖아.
내 주위에 괜찮은 남자 하나도 없는데
괜찮은 여자들은 좀 있거든'
전화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괜찮은 남자가 하나도 없다고
탕탕 마음에 못을 박는 당신의 말들
혼자 잔뜩 차려입은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맙니다
'소개팅은 뭐... 요즘 나도 좀 바빠'
당신 전화 속엔 나도 있는데
당신의 바로 앞에 내가 있는데
나는 당신의 친구가 아닌 당신이 좋은데
나로 인해
두근거리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렇게나 아닌 건 몰랐었다고
이 가을이 참 길어질 것 같다고
사랑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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